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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호치민 정신[9]



267.
호치민 정신[9]


     -미얀마정통부장관텐조장군/미얀마체신청장/포춘그룹MyaHan회장/tdvine 이인렬사장과 함께 양곤에서-

 

국가의 인프라 프로젝트는 주로 정부가 주도하는데 필자가 89년부터 베트남
사업을 하면서 한국과 베트남 양국 장관들 회담에 참석한 경험이 많이 있다.

 

그 과정에서 특이한 것은 한국 장관이 너무 자주 바뀌어 베트남 장관 재임

중 한국장관 3-4명을 상대하는 경우가 생겨 업무에 혼선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 측이 한국측보다 정책의 일관성이 있고 개인적으로도

안정감이 있어 보였는데 임기나 권위의 안정성은베트남의 큰 장점이다.

 

특히 미국과 전쟁 중에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있는 와중에서도 하노이
지도자들이 보인
안정감과 비타협적인 정신은 미국을 궁지로 몰아갔다.

 

미국은 2차 대전에 사용한 폭탄의 4배에 달하는 800만 톤을 투하하면서
하노이의 늙은 지도자들이 지쳐서 결국 정치적 협상을 할 것으로 오판했다.

 

그러나 늙은 지도자들은 침묵했고 시골 노인들은 선조들이 쿠빌라이 칸에
대항해서 저항의 본거지로 삼았든 동굴에서 베를 짜거나 무기를 만들었다.

 

미군은 메뉴에 따른 폭탄을 퍼부을 때 마다 하노이의 반응을 살폈지만
하노이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고 사상자 수 조차 발표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공습이 절정에 이루었을 때에도 하노이의 지도자들의 안정성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는데
베트남의 침묵은 의연한 항전의 결의와 반격의 의지를 뜻했다.

 

미국 대통령의 임기는 겨우 4년이지만 하노이의 지도자들은 50년 간을 인민
들을 이끌었으니 그들의
비타협적인 자세를 미국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논에서 일하는 베트남 여성들은 총을 쏠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긴 머릿단을
단단히 묶고 생활하여 그들의 결연한 항전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모든 인민들이 지도자들을 오랫동안 믿고 따라 준 바탕에는  호치민
 정신
이 함께했고 어떠한 압력에도 목표와 단결을 꺾지 않은 힘이 되었다.

 


친구여!


 

 

결연한 의지는 안정감을 만듭니다.

 

 


-2009년 11월14
미얀마 양곤에서 창형 올림-

 

 

 

 

                                                                   

 

 

 

 

                                                                                                                                                

 

by charleskang | 2009/11/14 19:21 | 트랙백 | 덧글(0)

266. 호치민 정신[8]


266.
호치민 정신[8]


 

          -09/10/14 터키 이스탄불에서-


당신들 마음 속에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들을 이렇게 끈질기게 만들지요?전쟁 중 미국 기자가 물었다.

 

궁금하면 우리의 역사를 한번 보시오. 외국 침략자들에 대한 투쟁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적들은 항상 우리보다 강한 상대였습니다.

 

과거 2000년에 걸쳐 이런 시련들을 겪은 우리 인민들은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은 신경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판 반동 수상이 대답했다.

 

BC111년부터 천 년이 넘도록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Viet[越族]으로만
알려진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전통과 토착문화를 가지고 끈질기게 항거했다.

 

13세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베트남의 Tran 왕조 만이 몽고의 쿠빌라이 칸을
 물리쳤고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를
디에 비엔 푸전투에서 패배시켰다.

 

이렇게 잘 훈련된 정신을 가진 민족이 우리의 역사에는 투쟁 밖에 없다
 세계최강의 미국과의 힘겨운 전쟁을 하면서 그
저항정신을 가다듬고 있다.

 

미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긴 세월 동안 타협이
 불가능했던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싸웠다는 것을 먼 훗날에 알았다고 한다.

 

호치민을 위시한 베트남 지도자들은 이러한 민족의 전통에 자신들의 이념을
접목시켜서 베트남
전통의 계승자로서 인민들의 역사의식을 고취시켰다.

 

베트남 지도자들은 농어민들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베트남
민족주의와 호치민 정신의 본거지가
촌락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89년부터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면서 만난 베트남의 고위 인사들의

대부분은 농 어촌 경제개발에 많은 관심과 정성을 보이는 것에 놀랐다.

 

그래서 베트남은 한국보다 훨씬 먼저 지방 자치제도가 정착되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지방정부에 많은 권한이 위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친구여!

 

 

저항정신은 베트남인의 자존심입니다.

 

 

-2009년 11월13 방콕에서 창형 올림-

  

 

 

 

 

 

 

 

 

 

 

 

 

by charleskang | 2009/11/13 00:18 | 트랙백 | 덧글(0)

265. 호치민 정신[7]



265.
호치민 정신[7]

    -09/10/10 미얀마 양곤에서 미얀마 정통부 장관인 '텐죠' 장군과 함께-
 

1979 2월초 중국의 등소평은 미국 정부의 공식 초청으로 방미했는데 이

때는 미국과 중국의 공식 국교가 수립되어 미국에 중국 열풍이 일고 있었다.

 

덩은 소련의 세계전략을 뒤흔들고 미국의 경제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소련을 비방하고 베트남에
따끔한 교훈을 주어 미국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덩은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마지막 개별 면담에서 베트남을 혼내 줄
경우 소련에게는 대안이 있으니
미국의 도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카터는 참모들과 의논한 끝에 중국이 군사 행동에 의존하지 말고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베트남을 지켜보는 것이 어떠냐고 부드럽게 제안했다고 한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렇게 젊잖게 말했지만 눈에 가시 같은 베트남을
중국이
손바 주기를바라고 있음은 자명하므로 등소평은 전쟁을 개시했다.

 

중 월 전쟁[3차 인도차이나 전쟁] 79년2월17 시작되었는데 등의
원래 계획은 며칠 동안 싸워서 상징적인 승리를 거두고 손을 떼는 것 이였다.

 

50만의 대군이 베트남의 중요지역인 랑산을 함락시킨 뒤 휴전하고 3
16일 군대를 철수 시키기 까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병력이 소요됐다.

 

우습게 보였던 전쟁이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베트남 군의 끈질긴 저항 탓에
중국이 쉽게 승리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뚜껑을 닫아버렸다.

 

이 전쟁에서 중국 군의 취약점과 상급 명령체계의 무능만 노출되고 말았다.

큰 형님으로 자처하든 대국이 이웃 작은 나라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밑바닥에 깔린 원인과 결과를 분석해보면 무어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그 무엇이 강한 나라가 항상 승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베트남인 끈질긴 저항 정신의 밑바닥에는

베트남 승전의 기획자로서 지도자인 호치민과 호치민 정신이 자리했다.

    

 

친구여!

 

 

베트남은 작지만 큰 나라 입니다.

 

 

-2009 119일 서울에서 창형 올림-

 

 

 

by charleskang | 2009/11/10 00:42 | 트랙백 | 덧글(0)

264. 호치민 정신[6]



264.
호치민 정신[6]


          -09/10/20 루마니아 부쿠레스트에서-
 
 

만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여 반동분자들을 억누르지 않으면 우리도

저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비디오를 본 후 당 간부들이 등소평에게 말했다.

 

그래, 우리도 개혁을 수행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혜택을 주지 않았다가는

저 꼴이 될 게야라고 등소평이 심각한 어투로 간부들에게 말했다.

 

1989년 민중봉기에 의해 루마니아의 민주화가 실현되고 차우셰스쿠 부부가
처형당하는 비디오 테이프를 본 중국 공산당 핵심 지도자들의 대화이다.

 

부쿠레스트 시민들이 비밀경찰에 맞서 싸우는 모습이 천안문 사태의 축소판

같았기 때문에 어렵게 천안문 사태를 잠재운 중국지도부에게는 충격 이였다.

 

똑 같은 사태를 보고 등소평은 개혁과 인민에게 혜택정책을 펼친 반면 북

일성은 반동 분자들을 억누르는데 전념했으니 서로 차원이 달랐다.

 

그 해는 소련연방의 해체와 동 유럽의 민주화, 중국은 천안문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베트남은 서방의 엠바고와 중국과의 국교단절로 고립상태였다.

 

강력한 후원자인 소련이 몰락하고 공산국가들이 줄줄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베트남 역시 무사하지 않으리라고 서방 세계는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아무런 내부 동요 없이 78년부터 캄보디아에 주둔했든 군

대를 철수시키고 86년 말에 시작한 도이 머이정책을 더욱 밀어 붙였다.

 

이처럼 모든 공산 정권이 붕괴하고 중국마저 흔들리는 시점에 베트남 인민

과 군대는 계속해서 국가 지도자에게 신뢰와 지지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은 바로 베트남 국가 자체가 인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세워졌고 비록

공산주의 이론을 빌려왔지만 인민을 위한 민족주의정권 이였기 때문이다.

 

인민의 생명, 자유, 행복을 위한 호치민 정신이 살아있는 베트남에서는 현

지 국민의 정서를 반하여 사업하면 에서 용납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친구여!

 

 

베트남에서는 민심이 곧 호치민 정신 입니다.

 

 

-09년 11월2 서울에서 강 창형 올림-

 

 

 

 

 

 

 

by charleskang | 2009/11/02 01:00 | 트랙백 | 덧글(0)

263. 호치민 정신[5]



263.
호치민 정신[5]


 

        -09/10/18루마니아에서-


우리 유학생들은 목숨 걸고 공부 했지요.

고국의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듯이 우리는 책과 싸우며 목숨 걸었지요

 

루마니아 출장 중 부크레스트 대학 앞을 지나면서 베트남 전쟁 기간 중에
루마니아에서 유학 했든 베트남 고위 인사들의 말이 문득 기억에 떠올랐다.

 

루마니아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자신들이 대학 시절 만난 베트남 유학생들은
 한결같이 악착같이 공부하는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고 술회했다.

 

1989년 말에 필자가 처음으로 통신 사업차 베트남 땅을 밟았을 때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러시아를 위시한 동 유럽에서 공부한 학위 소지자 이였다.

 

한국에서 근무한 전 현직 역대 주한 베트남 대사들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들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놀랐을 것인데 그 들 역시 평양 유학생 출신이다.

 

그들은 무슨 특권으로 전쟁 중에 그렇게 외국 유학을 할 수 있었을까?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으면 아마 특혜시비로 온 나라가 야단났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세계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베트남을 원조했는데 그
원조를 물질 대신 베트남 학생들을 공부시켜 달라고 베트남 정부가 요청했다.

 

베트남 정부는 러시아, 동독,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 북한 등에 대규모 유학생
들을 보내 인재를 육성시켰는데 그 인재들이 베트남 국가브레인이 되었다.

 

이 얼마나 먼 앞날을 내다 보는 선견 지명인가. 베트남 지도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은 멀티 플레이어라는 것인데 그들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졌다.

 

국내에서 목숨을 건 전쟁을 치르면서 국외에서는 미국의 반전 여론을 부추기는
한편 전쟁 후에 국가 재건에 꼭 필요한 인재를 동시에 육성해 나갔다.

 

국내에서 전쟁하는 청년들도 유학생들을 축하해 주고 국가의 장래를 짊어질
인재로 존중해 주었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호치민 정신의 산물이라 하겠다.


 

 

친구여!


 

 

인재 육성이 경쟁력의 원천입니다.


 

 

-2009 10 25일 서울에서 창형 올림-

by charleskang | 2009/10/26 14:41 | 트랙백 | 덧글(0)

262.호치민 정신[4]



262.
호치민 정신[4]

 


      -2009년9월 Vietnam Halong Bay의 선상 호텔에서 석양을 등지고-


베트남 하롱베이에서 크루즈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서 밤하늘을 보면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의 모습 속에서 그간 잊고 있었든 옛 기억들이 불현듯 되살아난다

 

어렸을 적에 본 것과 같은 모습의 별들이 옛날과 같은 위치에서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킴란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숨가픈 생존 경쟁과 오염된 서울의 공기 때문에 밤 하늘에 별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온 세월이 아쉽고 날로 변해가는 주위 환경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환경의 변화보다 더 빨리 조석으로 변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인데 사람에 따라서는
 항상 그 자리에 변함없는 모습으로 의연하게 서 있는 인물들도 있어서 좋다.

 

잘 나갈 때 주위에서 알랑거리든 사람들이 이해 관계에 따라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언제나 제대로 맺어 놓은 이런 인물들이 밤 하늘의 별처럼 지켜주고 있다.

 

옛날에 서로 인연을 맺은 베트남 친구를 만날 때 마다 한결 같은 마음과 자기에게
부여된 자리를 그대로 지키면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구찌 터널의 그 좁은 땅굴 속에서 오랜 세월을 참고 견디며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에 충실했든 베트남의 전사들을 움직이게 했던 힘을 과연 무엇 이였을까?

 

과연 무엇이 호치민 루트의 험준한 산길에 무거운 짐을 지고 운반하게 했는가?

한 때 조국을 등졌든 해외동포를 환영하는 지도자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가?

 

베트남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나는 그 정신의 균형을 잡아주는 존재를 느낄 수

있는데 그 존재는 그들의 영혼에 녹아 들어서 본능처럼 행동하게 만들고 있다.

 

그 존재가 바로 호치민 정신인데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일단 부여 받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정신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아름답지 않은가.

 

 

친구여!

 

 

정신이 바르면 행동도 바르답니다.

 

 

-2009 1019일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서 강창형 올림-

 

 

 

 

by charleskang | 2009/10/19 06:50 | 트랙백 | 덧글(0)

261. 호치민 정신[3]



261.
호치민 정신[3]


    -'09/10/3 포항 산소에서 성묘하며 형님가족과 함께[애기는 나의 손녀딸]-

 

강력한 집단을 결속하여 정권을 잡고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진 세계적인

지도자들은 많았지만 그들의 정신이 계속 계승되는 사례는 역사상 드물었다.

 

그들은 함께 꿈을 꾸었지만 집단 이기주의와 각 개인의 이해관계를 기초로

하였으므로 그 꿈은 모래성과 같이 그 인물들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지도자집단의 꿈은 그들과는 달랐다.

그 집단의 꿈은 곧 베트남 국민들의 꿈 이였고 개인의 이해관계는 없었다.

 

이 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베트남 독립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니
이들의 마음 속에는 집단이나 개인의 이해 관계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 꾸는 꿈은 그냥 꿈에 지나지 않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꾸면 그 꿈은 현실이 된다.

 

그들은 함께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버티고 험한 전쟁터를 누비면서 생명,
자유, 행복
을 국민들에게 되찾아 주겠다는 꿈을 결국 현실로 만들어 나갔다.

 

이들이 감옥에서 보낸 복역 기간을 합하면 222년 이다

호치민이 언젠가 당 중앙위원회의 31명의 경력을 회고하면서 한 말이다.

 

예를 들면 악명 높은 Con Son 섬 감옥에서 판반동수상과 레둑토는 함께
 6년을 보냈고, 인자한 인물로 비쳤든
톤 두크 탕대통령은 17년을 보냈다.

 

이렇게 감옥 생활도 함께한 경험을 공유한 베트남 지도자의 결속력과
호치민 정신으로 무장한 지도자들의 정신을 미국은 몰랐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들의 꿈은 원대한 것 이였기에 전쟁이 2000년 대까지 갈 것에 대비했는데

계획보다 이른 1975년 사이공을 함락 통일한 것은 호치민 정신때문이다.

 

나는 베트남 지도자들을 만날 때 마다 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받아 왔는데

그 들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 풍겨 나오는 호치민 정신의 향기때문이다.

 

 


친구여!

 

 


위대한 인물이 떠난 자리에는 향기가 남는답니다.

 

 


-2009년 10월 6
방콕에서 창형 올림-

 

 

 

by charleskang | 2009/10/06 00:28 | 트랙백 | 덧글(0)

260. 호치민 정신[2]





260.
호치민 정신[2]


 

        -'09/9/18 하롱베이에서 tdvine 이인렬 사장이하 임원들과-


베트남 같은 작은 나라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긴 비결은 무엇 이였을까?

그 것은 바로 국가 지도자들의 위대한 정신 자세이다.

 

1973년 베트남 철수를 위해 파리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한 공로로 미국의

키신저와 베트남의 레 둑 토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공동 지명 되었다.

 

베트남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벨상을 수상할 수 없다
전문을 보내고 동양인에게 처음 주어진 상을
레 둑 토는 받지 않았다.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은 은밀한 로비를 서슴지

않는 판인데 레 둑 토호치민 정신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행동이 달랐다.

 

호치민 사후 베트남이 통일 될 때까지 호치민의 단결이라는 유언은 전 국민의
 가슴에 새겨져서 11명의 정치국원은 추호의 흔들림이 전쟁을 수행했다.

 

통일이 되자 디엔 비엔 푸의 전쟁 영웅 지압장군과 프랑스 점령시기에
방직공장 직원 이였던 사이공 점령의 주인공
장군은 은퇴를 희망했다.

 

이 때 이 두 명의 장군의 은퇴 희망 사유는 소명을 다했다는 것 이였다.

이제 좋은 시절이 왔지만 그들은 할 일을 다했기에 은퇴를 희망했다고 한다.

 

요즘 하노이는 2010하노이 천년기념을 위한 공사가 한창인데 천 년의
 고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신 도시와 신시가지가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호치민은 유언장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남겼다.

 

우리 강, 우리 산,

우리 인민들은 그대로일 것이다.

양키가 패전하면 우리는 이 나라를

열 배 이상 아름답게 재건할 것이다

 

호치민의 유언은 하나의 묘비명이 되어 베트남 전 국민의 가슴에 새겨져서

하나씩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 저변에는 호치민 정신이 청아하게 자리한다.

 



친구여!

 

 


하노이에 가면 불탄 남대문이 생각납니다.

 

 


-2009년 9월30
서울에서 강 창형 올림-

 

 

 

 

by charleskang | 2009/09/30 09:48 | 트랙백 | 덧글(0)

259. 호치민 정신[1]



259.
호치민 정신[1]


 

          -'0/9/18 Vietnam Halong Bay 선상 호텔에서 1박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를 조물주에게 부여
 받았다
하노이 역사박물관의 동판 기념비에 새겨진 독립선언문의 문구이다.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베트남 인민에게 보장해 주려는 호치민의
 민족관, 가치관은 오늘날까지 베트남 지도자의 통치철학의 중심이 되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언젠가는 죽어 사라지지만 그 인물이 만들어 낸
정신과 그 정신에 따른 행동은 영원히 살아서 후세들의 삶의 등대가 된다.

 

닉슨의 제안으로 1969 8월 미국의 키신저와 베트남의 레 둑 토가 파리에서
비밀 협상을 하는 동안 93 79세인 호치민은 심장마비로 서거했다.

 

장례식장에서 레 두안당 제1서기는 영문으로 인쇄된 호치민의 의지라는

제목의 유언을 낭독했는데 죽기 4개월 전에 호치민이 직접 작성한 유서였다.

 

최우선으로 당에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리 당과 우리 인민들의 가장 값진 전통은 단결이다. 중앙위원회에서

세포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사들은 그대들 눈동자와 같이 단결해야 한다

 

미국은 호치민 서거 후에는 다른 공산국가처럼 후계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
때문에 국가가 분열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완전히 착각 이였음을 알았다.

 

사후에 예견되는 문제점을 사전에 알고 유언을 하고 그 유언을 충실히 지킨

베트남의 지도자들의 위대함의 중심에는 항상 호치민 정신이 자리했다.

 

이 정신 때문에 베트남에는 30년 동안의 긴 전쟁 기간 중에 호 아저씨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19754티우월남 대통령은 금괴 2톤을 가지고 조국을 등졌고 사이공
 최후의 날인 430일 미국대사와 2명의 해병대원은 성조기만 가지고 떠났다.

 

인간은 급박한 상황에서 가장 아끼는 것만을 가지고 떠나는데 금괴를 챙겨

떠난 자와 성조기만를 가지고 떠난 사람의 정신 자세는 무엇이 다를까?          

 

 


친구여!


 

 

인간은 떠나도 정신은 살아남지요


 

 

-2009년 9월28 서울에서 창형 올림-

 

 

 

 

 

 

 

by charleskang | 2009/09/28 00:19 | 트랙백 | 덧글(0)

258. 베트남과 태국



258.
베트남과 태국



       -'09년 8월14일 태국의 라이용 리저트에서-

 

스포츠 경기에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으면 격렬한 감정이 서로 생기듯이

동남아 국가인 태국과 베트남이 경기를 하면 이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다.

 

한국 국민들이 일본에게만은 꼭 이기기 싶어하는 것과 비슷하게 베트남
국민들은 태국에게는 지기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특히 태국과 베트남은 국경이 서로 접하지도 않고 서로 전쟁을 한 경험도
없으니 아마도 일본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태국은 베트남 전쟁 시에 미국의 후방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미국의 도미노

이론을 지지하여 아세안을 구성하여 베트남의 팽창을 저지한 적이 있다.

 

2차 대전시 태국은 일본 편에 섰고 베트남은 일본의 침략에 고통을 받았다.

특히 일본 군의 수탈로 흉년을 맞은 베트남은 200만 명이 굶어 죽기도 했다.

 

방콕의 최 고급 아파트나 레스토랑은 주로 일본인들이 주 고객인데 그 것은
 엔화의 강세 영향도 있지만 이처럼 일본과 태국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이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서구 식민제국을 몰아내고 동남아를 확장된
일본 제국[동아시아 공영 권]의 경제적 중추 권으로 편입시키는 전략 이였다.

 

이 때 일본이 가장 관심을 가진 국가는 동남아 대륙 중심에 위치한 태국과

중국 내지로 연결되는 철도망을 가진 베트남 등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이였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하자 일본의 동남아 침공은 본격화 되었는데

베트남에서는 프랑스 식민당국과 일본군이 공존하는 이상한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태국은 자발적으로 일본편이 되어 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과
밀월관계를 유지 했고 전쟁 후에는 미국과 한편이 되어 베트남을 괴롭혔다.

 

식민지지배도 받지 않고 2차 대전에는 연합군에 등을 돌리고 베트남전쟁

시에 미군 기지를 제공한 태국에 대한 베트남의 국민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

 

 

 

친구여!

 

 

적의 친구는 적이랍니다.

 

 

-2009년 9월14 하노이에서 창형 올림-

 

 

 

 

 

 

by charleskang | 2009/09/14 00:26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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